가는 해, 오는 해가 갈리는 때이다.
아무리 바쁘더라도 정초에는 지난 것을 돌아보고 다가 올 것을 기획하고 예견하는 짧고 길고 간에 누구나 한 번쯤은 생각에 잠기게 될 것이다.
‘시간은 세상의 혼(魂)’이라 말한 철인이 있었다. 시간의 혼을 찾아 삶의 의미를 새기고 이 세상의 기쁨과 보람을 보태고 그런 가운데 세상은 더 살기 좋은 곳으로 바뀐다. 이런 값진 지향이 있어야 한다.
이런 삶에는 촌각이 광채로 빛나고 새로운 한 해의 시작은 장엄하기까지 하다. 천시(天時)가 우리에게 ‘새해’라는 진솔(眞率)의 옷을 입혀 줄 때 우리는 하늘을 날 것 같고 그 순수함은 오래 간직하고 싶어진다.
주시(注視)한다는 얘기는 되는대로 정치를 구경한다는 뜻이 아니다. 국민의 합의대로 정치가 제대로 가고 있는가를 지켜본다는 얘기다.
내가 승리를 위해 싸울 때 그 승리는 나의 것이 되고, 내가 하늘을 날 수 있을 때 하늘은 나의 것이 되며, 내가 헤엄치고 항해할 수 있을 때 바다는 나의 것이 된다. 하나의 대상은 내가 그 안에서 내 모습을 찾아볼 수 있을 때에만 나의 것이 되는데, 그 안에서 내 모습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은 내가 거기에 참여했을 때에만 가늠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자기 개발서의 한 구절이 아니다. 보브아르의 철학 에세이에 나오는 구절이다.
오래전의 번역을 다시 손질하면서 생각해 보니 20세기 중반 세계 지성계를 강타했던 실존주의 철학은 이제 철학의 반열에서 내려와 대중 속에 스며들어 자기개발의 기본개념이 되어 있었다. 요즘 젊은이들이 자조적으로 또는 윗세대와 분리하여 자신들의 동질성을 확인하기 위해 스스로에게 붙인 ‘잉여(剩餘)’라는 말 역시 실존주의의 기본개념이다.
사르트르에 의하면 ‘모든 인간은 잉여’다. 잉여란 꼭 필요하지 않고 남아도는 여분의 것이란 의미다.
우리는 어떤 목적이나 소명을 가지고 태어난 것이 아니고 필요한 존재도 아니다. 그저 우연히 아무런 값어치 없이 이 세상에 던져졌다. 이 세상에 있어도 좋고 없어서도 좋은 나머지 여분의 존재다.
다시 말하면 무상성(無償性)이고 잉여다. 그런 의미에서 인간은 본원적으로 당당하게 살 권리가 없다. 우연적이고 무상적인 존재이므로 우리 인생은 오롯이 어떤 행동을 하느냐에 달려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자신의 선택과 기회에 달련 문제다. 여기에서 하이데커의 인간이란 먼 곳의 존재라는 말이 나왔다.
인간은 그러한 바의 존재라는 말이 나왔다. 존재가 아니라 먼 훗날의 어떤 존재라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인간을 가능성의 존재로 보는 실존주의는 참으로 젊은이를 위한 철학이었다.
가능성이란 시간을 전제로 하는 것인데 시간은 젊은이에게 있는 것이지 노년에게 있는 것이 아니다. 한 번 흘러간 시간은 우리의 간절함에도 되돌아오지 않는 무심한 것이다.
시간의 의미를 안다는 것은 인생의 의미를 아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