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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가이며 교육자이고 민족운동자였던 남강(南岡) 이승훈(李昇薰) 선생은 1864년 평북 정주에서 태어났다.
궁핍한 서민 집안에서 태어나 4년 여간 서당에서 한문을 익히다 16살 남짓할 무렵 유기상에서 사환생활을 시작한 선생은 타고난 근면과 성실함을 인정받아 3년 뒤 수금원이 되고, 결혼과 동시에 보부상이 되어 평안도와 황해도를 전전하며 자본을 모았다. 그리고 1887년에는 유기공장을 세워 큰 성공을 했지만, 청일전쟁으로 상점과 공장이 전화로 잿더미가 되었다.
이후 자본을 차용해서 다시 상점과 공장을 세우고 평양, 진남포, 서울, 인천 등을 내왕하며 국내 굴지의 부호가 되었으나 1904년 러일전쟁으로 다시 사업이 실패하여 낙향을 했다.
이승훈 선생이 기업가에서 교육자와 민족운동가로 전환하는 결정적인 계기는 평양에서 안창호 선생의 <교육진흥론> 강연에 감동받고 부터이다. 곧이어 서당을 개편한 강명의숙(講明義塾)을 설립하고, 민족운동의 요람인 오산학교를 개교하여 수많은 인재 배출과 민족교육에 금자탑을 이뤘다. 그리고 선생은 국권을 되찾을 목적으로 무관학교를 설립하려 했던 안명근 사건, 즉 안악사건(安岳事件)과 민족운동을 주도한 신민회 105인 사건의 대표적 인물로 지목되어 투옥과 출옥을 거듭했다.
출옥 후 신학공부를 위해 평양신학교에 입학한 선생은 1919년 3.1운동의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참가한 죄목을 받아 6인의 수감자 중에서 가장 오랜 옥고를 치루기도 했다.
1924년 김성수 선생의 요청으로 동아일보 사장에 취임하여 조만식 선생과 물산장려운동을 주도한 후 다시 오산학교로 돌아간 선생이 별세한 때는 1930년 66세이다. 평소에 의(義)의 실천, 즉 거짓, 게으름, 이기심, 권모술수, 아집을 버리고 큰 뜻을 품고 생활하는 실천적 삶으로 만인의 존경을 받던 선생에게 정부는 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했다. 사용하고 있는 안경은 플라스틱 재질의 원형 안경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