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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패할 때 성공을 잡아라! - KFC 창업자 ‘커넬 샌더스’ 1000번이 넘는 거절 겪으며 62세 때 KFC 설립 수없이 반복되는 실패와 좌절에도 불굴의 도전으로 성공 쟁취 김보라 기자 2024-11-29 20:35:38

커넬 샌더스(샌더스 대령)로 불리는 KFC(Kentucky Fried Chicken)의 창업자 할랜드 데이비드 샌더스(Harland David Sanders). 

 

커넬 샌더스는 미국 남부에서 요리되던 치킨의 레시피를 새롭게 개발해 세계 제일의 치킨 프랜차이즈를 설립한 인물이다. 

 

특히 그는 1000여 번이나 거듭되는 투자 요청을 거절당하면서 끝내 1952년 62세에 KFC 1호점을 오픈한 불굴의 의지를 가진 성공인이다.

 

특히 말년에 자신의 지분 전체를 매각한 후 스스로 KFC의 홍보대사 겸 모델로 활동한 그는 지금도 세계 곳곳에 그의 동그란 안경과 염소 수염, 흰색 양복, 지팡이가 매장의 상징물로 서 있다. 

 

그의 이 같은 모습은 커넬 샌더스가 자신의 치킨 조리법을 판매하러 남루한 옷차림으로 미국 전역을 다닐 때 모습으로 그의 흰색 양복은 상대방에게 좋은 인상을 주는 트레이드 마크가 되기도 했다.

 

커넬 샌더스.

 

그는 1890년 미국 인디애나 주 헨리빌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6세 때 아버지를 잃은 후 어머니의 농장 일을 도왔고, 12살 되던 해에 어머니의 재혼으로 생긴 계부와의 극심한 갈등으로 14세에 고향을 떠나 보험 판매원, 보일러 점검원, 시내 전차에서 일하는 등 그야말로 닥치는 대로 생업에 뛰어들었다. 

 

당시 생활하는 것이 너무 힘들었던 커넬 샌더스는 생계를 위해 16세에 나이를 속이고 미합중국 육군에 입대했으나 이마저도 병으로 4개월 만에 전역했다.

 

이어 사회로 복귀한 커넬 샌더스는 철도노동자, 소방관을 거치며 19세에 결혼해 슬하에 3남매를 두었고, 1920년 투자자에게 고용된 형태로 레스토랑 카페를 오픈했다. 

 

그러나 운전자를 대상으로 시작한 이 카페는 얼마 되지 않아 근처에 다리가 개통되면서 고객이 급감해 폐업했다. 

 

이어 자동차의 유행을 목격한 커넬 샌더스는 투자자를 설득해 주유소 사업에 뛰어들어 순조롭게 성공하는 듯 했으나 이마저도 1929년 세계 경제 대공항이 닥치면서 주유소를 폐업했다.

 

그러나 기족들의 생계를 책임진 가장으로서 마냥 주저앉을 수 없었던 그는 식사까지 제공하는 자동차 카페형 주유소를 다시 세워 적잖은 성공을 거두었다. 

 

이때 음식에 자신감을 얻은 커넬 샌더스는 레스토랑에 전념하기 위해 주유소의 지분을 매각하고 본격적으로 ‘샌더스 카페’를 오픈해 지역에서 유명한 맛집으로 성공했다. 

 

그리고 이때 축적한 자금으로 여행객을 위한 모텔사업에 뛰어들었으나 예상치 못한 큰 화재와 곧이어 닥친 제2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관광객이 급감하며 모텔을 폐업했다.

 

 

닭을 튀기는 전용 압력솥과 11가지 재료 개발

이후 실의에 빠진 커넬 샌더스는 새로운 사업 구상에 몰두했다. 

 

즉 닭고기에 여러 양념을 바른 후 후라이팬에 기름으로 튀기는 자신이 어릴 때 먹었던 미국 남부식 치킨을 개발한 것. 

 

그러나 이 조리법은 요리시간이 30~40분씩 소요되는 단점이 있었는데, 커넬 샌더스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궁리 끝에 압력솥을 개발했다. 

 

더구나 자신이 개발한 압력솥으로 닭을 튀기면 예전보다 시간이 단축되는 것은 물론 살코기도 훨씬 촉촉해져 고객들이 더 좋아했다. 

 

이어 치킨을 단시간에 튀기는데 성공한 커넬 샌더스는 치킨 맛을 개선하기 위해 허브 등 11가지 재료를 개발해 맛까지 살리는데 성공했다. 

 

이때의 성공으로 자신감이 붙은 커넬 샌더스는 상원의원에 두 번이나 출마했으나 모두 근소한 차이로 패배하며 적잖은 재산을 잃기도 했다.

 

더구나 좋지 않은 일은 한꺼번에 닥친다고 치킨을 튀기는 전용 압력솥과 새로운 레시피 개발로 승승장구하던 그의 레스토랑은 또 한 번 위기에 직면했다. 

 

바로 레스토랑 인근에 새로운 도로가 나면서 고객이 급감한 것이다. 

 

그는 고민 끝에 부득이 문을 닫았다. 

 

이때가 그의 나이 60세로 빈털털이가 된 그의 유일한 생계 수단은 매월 정부로부터 받는 사회보장금 105달러가 전부일 정도로 극심한 가난에 시달렸다. 

 

커넬 샌더스는 이때부터 자신의 전 재산이었던 낡은 트럭으로 전국을 돌며 투자자를 찾아다녔다. 

 

사업 방식도 자신이 직접 레스토랑을 오픈하지 않고 치킨 제조법을 전수해 그 수익금의 일부를 받는 치킨 프랜차이즈 사업을 전개했다. 

 

그러나 세상에 만만한 것이 없듯이 커넬 샌더스는 1000번이 넘게 투자자를 찾아다니며 자신의 사업에 투자할 것을 요청했으나 그때마다 거절당했다. 

 

그러다 미국 전역을 다닌 지 2년만인 1952년 미국 유타주 솔트레이크 시티에서 피트 하먼을 만나 투자를 약속 받았다. 

 

그야말로 1천 번이 넘는 거절 끝에 성사된 사업 승낙이었다.

 

 

말년에 지분 매각 후 KFC 홍보대사로 전국 순회 

피트 하먼은 커넬 샌더스의 치킨 요리법을 켄터키 대령이라는 커넬 샌더스의 닉네임에 착안해 상호를 KFC로 정하고 1호점을 오픈을 오픈했다. 

 

지금도 1호점에는 커넬 샌더스와 피트 하먼이 함께 한 동상이 세워져 있다.

 

이후 맛집으로 소문이 나며 고객이 몰려드는 KFC를 지켜본 사람들이 앞 다투어 가맹점에 가입했고, 그들은 커넬 샌더스의 조리법과 상호 등을 사용하는 조건으로 치킨 당 0.04달러의 로얄티를 제공했다.

 

이처럼 재기에 성공한 커넬 샌더스는 1959년에 본사를 설립하고, 1962년에는 자신의 조리법을 특허 받으며 미국 전역에 600여 가맹점이 오픈했다. 

 

이 무렵 커넬 샌더스는 KFC의 미국 전체 프랜차이즈 사업을 제안한 존 브라운 주니어와 잭 머시에게 자신의 모든 권리를 200만달러(당시 기준으로 한화 192억원)에 매각하고 홍보대사로 활동했다. 

 

또 치킨 조리법은 자신에게 처음 투자했던 피트 하먼에게 그 권리를 이양했다.

 

그는 KFC의 지분을 모두 매각한 후에도 평소 길을 가다가 KFC 매장이 나타나면 무조건 들어가 메뉴를 시식하고 만약 자신의 기준에 미치지 못하면 그 즉시 음식을 집어던지며 난리를 피울 만큼 자신의 레시피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했다.

 

노년에도 KFC의 홍보대사로 활동하던 커넬 샌더스는 뒤늦게 백혈병에 걸려 1980년 90세의 나이로 하얀 양복을 입고 무덤에 묻혔다. 

 

이 당시 그의 KFC는 전 세계 48개국에 6천여 가맹점이 입점하고, 연간 200억 달러의 세계적인 프랜차이즈로 성장했다. 

 

수없이 많은 실패를 거듭하면서도 불굴의 의지를 불태웠던 괴팍한 성격의 고집쟁이 커넬 샌더스. 

 

그가 세운 KFC 매장이 한국에 최초의 1호점이 오픈한 것은 그가 사망한 지 4년 후인 1984년 종로 2가에서였다.


출처: 옵틱위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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