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작품에서 환희를 구가한다는 것은 실은 눈앞의 참담한 현실에 대한 반증일 가능성이 많다. 베토벤 교향곡 제9번 4악장(‘합창’ 중 ‘환희의 송가’)이 그렇다. 우리가 이 장엄한 환희의 노래를 새해벽두가 아닌 낡은 해의 끝자락에 연주하는 까닭도 비슷한 문맥일 것이다.
낡은 것이 극치에 다다랐을 때 그 과거를 떠나보냄으로써 비로소 새로운 것을 맞아 드릴 수 있기 때문이다. 비록 어제 떠올랐던 태양과 오늘 떠오를 태양이 다를 것 하나 없지만 우리는 그럼에도 바뀐 숫자와 더불어 늘 어떤 새로운 세상이 우리 앞에 열리기를 꿈꾼다.
낡은 달력을 버리고 새 달력을 거는 일이 대단한 일은 아니더라도 새로운 세상이 도래했다는 착각이라도 좀 키워야 살아갈 맛이 나지 않겠는가.
첫째 요청은 공동체 의식의 함양이다. 뒤늦게 산업화의 과정에 참여한 우리는 성공적으로 고속성장을 이뤘지만 이 과정에서 물질 만능주의와 무한경쟁 문화가 사회에 팽배하면서 자신만을 생각하는 이기적이고 무책임한 인간들이 양산되고 있다.
사회적 환경은 매우 고단하고 삭막해졌다. 인성 배려 공동체 의식의 이야기도 도처에서 들려오고 교육에도 이 소리가 번져간다. 청문회에서 볼 수 있듯이 지도층 인사들부터 제대로 모범을 보이고 있지 못하다.
자라나는 세대의 교육에 기대를 걸지 않을 수 없다. 이웃과 공존하는 대신에 내 고집과 집념만 앞세우며 살았다. 내 스스로가 얼마나 공존을 고민하며 살아왔는지 고백하고 싶었다.
공자는 인생 마흔이면 불혹(不惑)이라고 했다. 대한안경사협회 제44차대의원총회는 불혹의 절반이 지난다. 문제는 불혹에 걸맞게 성장했는가. 공동체 의식 말이다.
역사는 고난의 온축(蘊蓄)과 의미의 기록이다. 평소의 상식, 신념과 양심에 따라 급박한 상황에서도 평정심을 잃지 않았다는 것이다.
아이들에게 화려한 매뉴얼이나 견고한 시스템보다 먼저 가르쳐야 할 것은 정의와 양심이며, 실수를 저질렀을 때 부끄러워할 줄 아는 마음과 사과할 줄 아는 지혜다.
또 나아가 나의 자존감이 상처받았다고 생각하기 이전에 내가 원하는 것들이 과연 옳은 것인지를 비판적으로 질문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내 삶의 고민이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관계 속에서 봐야한다는 명확한 시선, 그 시선에 누구나 모두 날카롭게 인식해야 할 것이다.
한 번 흘러간 시간은 우리의 간절함에도 되돌아오지 않는 무심한 것이다. 잘못된 과거를 따져 묻는 것은 부질없다. 시간은 양적인 것이지만 의미의 길이기도 하다.
시간이 의미가 될 때 시간은 언제나 현재가 되고 영원이 된다. 의미로 창조해 나가는 사람에게 시간은 자신이 지닌 소중한 가치를 내어준다. 이것이 바로 행복이다.
행복한 사람의 매일은 날마다 좋은 날일 수밖에 없다. 합리는 비합리를 응징한다. 늦더라고 반드시 한다. 합리를 팽개친 자리엔 비극과 후회만 남는다.
그리고 자연과 주위도 지리멸렬해 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