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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젊은 안경사의 라식수술 부작용 취재기지난해 어느 무더운 여름날, 한 젊은 안경사의 사연을 듣고 직업상 특종 욕심을 냈던 일이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특종에 목마른 기자라고 해도 이 사연을 못들은 척 지나쳤던 이유는 조금이나마 피해 당사자와 그 가족들의 아픔을 이해하려는 심사에서였다.
더구나 2년 전 부산에서 유사한 사건이 발생해 2차에 걸쳐 부산을 뛰어다닐 때 만난 담당 형사가 “진행 중인 사건은 절대 말할 수 없다”고 완강하게 버티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허탕을 친 경험도 있던 터여서 괜한 힘 빼지 말아야겠다는 생각도 없지 않았다.
다만 안타깝고 분통터지는 이 이야기를 마음 한 구석에 담았던 이유는 부산의 한 젊은 여성이 라식수술 부작용으로 실명을 비관하다 스스로 목숨을 끊은데 반해, 이번 경우는 라식수술 후 심한 비문증에 시달리다 택한 자살이 미수에 그친 때문이 아니었다. 이유는 바로 문제의 청년이 안경사라는 점 때문이었다.
그러다 지난 2월 초, 업무 상담을 위해 만난 K씨와 이야기하던 중 라식수술 피해자 Y씨의 아버지가 바로 이 분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순간 반가움과 놀라움이 교차한 기자 입장에서 돌부처처럼 질문 하나 없이 듣는 것도 예의가 아니기에 고통스럽게 쏟아내는 K씨의 상처난 조각들을 조목조목 꿰맞추고 있었다.
그리고 대화 끝에 어처구니없이 벌어진 이 사연을 기사화 시키는게 어떠냐고 넌지시 물었지만 예상대로 K씨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하기야 뼈를 깎는 아픔이라도 진실만큼은 바로 알려야 한다는 침 발린 표현 이외에 별다른 설득 방법이 있을 리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라식수술의 피해 사실을 세상에 알려야 한다는 확신만큼은 시간이 지나도 너무나 분명해서 그날 이후 수차례의 설득 끝에 마침내 허락을 받아냈다.
눈부심•빛번짐 현상 시간 지날수록 깊어져
흔히 배 아파가며 낳은 자식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다지만, K씨가 들려준 아들 Y씨는 전도가 유망한 젊은이었다. 180cm가 훌쩍 넘는 훤칠한 키에 외모도 준수했고, 군대를 전역한 후에는 대학 복학과 졸업, 그리고 곧바로 개설한 안경원은 누가 봐도 큰 평수에 완벽한 시설까지 갖춤으로써 Y씨의 앞날은 탄탄대로처럼 보였다.
그러나 Y씨는 안경원 개설 후 얼마 못가 모든 꿈을 접었다. 군대 입대 후부터 나타나기 시작한 비문증이 안경원 개설 직전부터 걷잡을 수 없을 만큼 심해졌기 때문이다. 누구나 손쉬운 수술이라고 말하던 라식수술 후유증이 3년만에 본격적으로 Y씨를 암흑 속으로 밀어내고 있었던 것이다.
처음에 Y씨는 예전과 다르게 햇빛이나 불빛에 눈부심이 심해졌고, 파리 같은 것이 날아다니는 현상이 있었지만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그러다 군대 복무 중반부터 야금야금 시력을 갉아먹던 비문증이 대학에 복학하면서부터는 강의실 칠판 글씨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악화되었다. 모든 사물이 위아래, 또 오른쪽과 왼쪽에 수없이 많은 사선들 때문에 강의실보다 하숙방에 있는 날이 늘어났고, 졸업과 함께 안경원을 개설할 무렵에는 오히려 원장이 영업을 방해할 정도로 시력이 급격하게 나빠졌다.
Y씨는 결국 안경원을 기사들에게 떠맡기고 하숙방에 2개월 가까이 은둔생활을 시작했다. 그동안 야금야금 잃어가는 시력에 고민과 번뇌를 거듭한 터여서 어두컴컴한 밀실생활이 오히려 편하기도 했다. 세상에 더 이상 기대할 것도 없었고, 미련을 두거나 애착을 갖는 것보다 내몸 하나 내던지면 오히려 부모 형제를 편하게 만든다는 생각뿐이었다. 더구나 나빠지는 시력을 비관해서 이미 팔목을 칼로 그어본 경험도 있었기에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Y씨는 결국 인터넷에서 자살 사이트를 찾아내고 비슷한 생각을 가진 6명과 의논 끝에 자살 여행을 떠났다. 이 모임의 우두머리는 이 세상에 놓고 갈 것이 없다는 듯 일행을 위해 봉고차를 렌트하는 것부터 방값, 식사 값 등 경비의 대부분을 댔다. 젊은 여자까지 참여했던 이 자살여행은 부산 태종대를 거쳐 수원, 그리고 태안 등 전국을 떠돌다 1달여 만에 최종 종착지로 택한 고창에 도착했다. 그리고 자살 방법을 논의한 끝에 모텔방에 연탄불을 피우는 것으로 확정한 후 이 모임의 리더는 자살 방법이 싫었던지 자살 감행 이틀 전 야산에서 목을 매었다.
그러나 나중에 알게 된 일이지만, 이 무렵 Y씨의 하숙방에서 유서를 발견한 하숙집 아주머니의 신고로 실종자를 찾기 위한 수사대가 이미 서울 S경찰서에 설치되어 있었다. 벌써 열흘 넘게 Y씨의 가족들과 실종 수사대는 전국 각지에서 올라오는 사건 사고를 파헤치고 있었다.
그러다 Y씨가 이 세상에서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일, 자살 결행 직전에 라면을 먹고 싶은 충동에 현금인출기를 찾은 모습이 전국에 그물망을 쳐놓은 수사대에 포착되었다. 바로 아버지 K씨가 자신의 명의로 개설해 건네준 카드로 현금을 인출하는 모습이었다. 이어서 긴급히 연락받은 해당 지역 형사들이 고창 인근의 모텔들을 뒤진 끝에 연탄가스에 중독된 이들 일행을 발견했으나 Y씨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둔부를 연탄불에 데운 채 쓰러져 있었다.
자살 결행 후 구사일생으로 구출돼 Y씨가 라식수술을 결정한 것은 그야말로 우연이다. 시력도 생활하기에 불편하지 않은 -2.75에 난시도 심하지 않은 편이었다. 바로 위의 형이 양쪽 눈이 심하게 다른 난시 때문에 라식수술을 받기 전까지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던 수술이었다. 그러나 얄궂은 인생의 변조 때문일까. 안경을 벗으면 왠지 편할 것 같다는 단순한 생각, 라식수술은 누구든지 일정한 도수를 정해서 간단하게 시력을 바꾸는 수술이라는 광고에 이끌려 Y씨가 찾은 곳은 서울 압구정동에 소재한 모 안과병원이었다. 사실 사람마다 서로 다른 시력과 특수성을 무시하고 일정한 모양으로 붕어빵 찍어내듯 만들 수는 없는 데도 의심을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수술 후 1년 만에 군대에 들어간 Y씨는 자대에 배치되고부터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눈부심 현상이 나타났다. 처음에는 수술 후 일어나는 일시적인 현상이라고 예사롭게 지나쳤지만, 전역 후 복학생 때는 파리가 날아다니던 모습 이외에 어느덧 모든 사물이 위아래, 좌우로 온통 거미줄이 쳐진 채 희뿌옇게 보이기까지 했다. 이미 Y씨의 시력은 느낌과 감각으로 살아가는데 익숙해져 있었고, 아버지 K씨가 아들의 시력 이상을 알게 된 것은 이 무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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