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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비하는 노력은 기회와 운이 따른다” - 전국 안경인들… ‘기존 처방’ 자구•자동검안기 사용 불가•안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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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8 궐기대회 막전막후

헤로도투스의 관심사는 ‘과거의 기억이 시간의 경과로 인해 사람들의 머릿 속에서 사라져가는 것을 막고 또 위대한 업적들이 끊임없는 영예를 누릴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과거에 일어났던 일들을 기록하는 것이다’라고 언급했다.

1989년 6월 19일 공포된 안경사법은 안경인들에게 지금까지 관행되어 오던 안경업권이 법률화를 빌미로 오히려 침해당하게 되는 악법이었다.

그 첫째가 안경사의 업무범위인데, 의료기사법 제1조에 의해 안경사는 시력보정용 안경의 조제 및 판매업무에 종사한다. 또 동법 시행령 제2조 1항에 의해 이 경우 기존(旣存) 안경도수를 조정하기 위한 시력검사를 할 수 있다.

여기에 「기존」이란 단서 규정은 누가 보아도 기존 처방이 내포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두 번째는 전국 안경점에 없는 곳이 없을 정도로 비치된 자동굴절측정계(Auto-refractometer) 역시 시행법규는 사용 불가 내지 규제하고 있다는 점이고, 셋째는 안경사법은 안경사가 주체여야 하는데 오히려 예속시킨 점이 있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현대사회는 산업사회다. 산업사회는 분업화를 의미하고 분업화는 전문인을 살려야 되는 입법적 취지와 목적이 있어야 하는데 대명제(大命題)를 일탈할 조항이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서 범안경인들이 한 목소리로 위급한 사항을 타개하기 위한 안경사법 반대 대책위원회를 결성하기에 이른 것이다.

범안경인 비상대책위원회는 어떤 구성원들이 망라한 단체인가…, 살펴보면, 사단법인 안경인협회를 주축으로 한국안경유통협의회•한국안경학교 총동문회•전국보건전문대학 안경광학과 총연합회•한국안경기사협회 등이 참여하여 안경업계의 전국적인 지지와 성원을 받았다.

안경사법 반대대책위원회라는 이름으로 첫 봉화(烽火)를 든 곳은 89년 7월 16일 부산 대청동 소재 카톨릭센터에서 백산광학 김호곤 대표, 서울안경인회장 이강훈, 전북회장 전종만, 이대영 부회장 그 밖에 전남•충북•경남 등지에서 현 임원들이 참석했다.

부산에서는 김태환(대광당 안경)씨가 대책위원장으로 선출되고, 권봉우씨가 간사를 맡아 수고했고, 대소사 구별 없이 준비에 만전을 다한 이선춘 준비위원이 혼신의 힘을 다했다.

안경사 궐기의 기원이 된 부산대책위원회는 급기야 8월 19일 대전에서 전국 안경인 임시대의원총회를 열게 하여 회장단과 임원들을 불신임하여 새로운 집행부를 결성하는데 앞장 선 기여를 했다.
 
그 총회에서 집행부가 물러나고 새 집행부가 들어섰지만 얼마 못가 그만두게 되어 그야말로 난파 직전의 배였는데 다행히도 당시 정원석 부회장이 협회장을 대행하여 9월 7일 새 집행부가 들어 설 때까지 헌신적인 노력으로 대과 없이 업무를 수행함으로써 분분한 여론의 파문을 잠재울 수 있었다.

9월 7일 한국일보 12층 대강당에서 임시대의원총회를 갖기 3일 전 서울 만리성(중화요리점)에서 1차 대의원총회에서 결의된 범안경인 안경사법 반대 대책위원회를 구성했는데, 위원장에 김호곤(백산광학) 부위원장에 박노도(한일광학), 전화중(중구 분회장), 오찬성(한국유통협의회회장)씨가 선출됐다.
그리고 대책위원회의 핵심적인 중책인 간사에 안경업계 원로이신 정순원씨가 맡았다. 그 밖에 조창남, 임채진, 윤인한 씨 등 실행위원들이 내 일처럼 불철주야 뛰었고, 특히 김이식 씨는 전국을 종횡으로 누비며 안경사법 개정에 남다른 정열을 쏟아 부었다.

전국 각 시도 대책위원들도 주어진 소임을 다했다. 부산에서 지역이지만 전국 규모의 대책위원회를 결성했지만 대책위원회의 숙원업무를 수행하려면 아무래도 부채의 선축(扇軸)이 되는 중앙에 있어야 한다는 당위론에서이다.

공포된 안경사법은 부분개정으로 될 것이 아니라 개정(改正)해야만 했다. 첫째로 지금까지 안경인들이 관행되어 오던 생업권을 침해하는 일체의 시행 법규는 절대로 수용할 수 없다는 것이고, 둘째 타각식 검안기라는 것으로 자동시력측정계 사용금지는 문명이기를 도외시한 전근대적인 낡은 사고의 소산으로서 컴퓨터(Computer)라는 전산화의 첨단산업을 막으려는 시대적 우행(憂行)이라고 밖에 볼 수 없다하겠다. 안경렌즈를 고르기 위한 굴절검사는 의료행위가 아니라는 것이다.

89년 9월 7일 사단법인 대한안경인협회 9대 집행부와 함께 김호곤 위원장은 대구 안경인회•부산, 그리고 경북지역과 제주도를 빼곤 모두 순회하면서 안경사법이 악법임을 설명하며 반드시 우리 손으로 개정해야 한다고 역설하여 크나 큰 환호를 받았다.

전국 순회강연에서 크게 얻은 것은 대내의 융화•화합•협력의 광장에 모일 수 있는 열정적인 중의(衆疑)를 도출해 내는데 자신감을 얻었다.

그리하여 동년 9월 29일 서울 88체육관에 전국 안경인들이 모여 한 목소리로 국민에게 알리고, 한편으로는 주무당국에 탄원•진정•호소하는 궐기집회를 가졌다. 허가된 집회는 질서정연했으며 1만 5천여 명이 우렁찬 한 목소리로 낸 호소는 결코 수와 세(勢)를 과시하려는 데모성 궐기가 아니었다.
 
이로 인해 관계당국이나 입법부도 신중히 경청하고 타당성을 인정하면서 12월 18일, 안경사법 개정입법이 통과되기에 이른다. 마지막 지푸라기(last straw)를 잡는 심정으로 모인 것은 필연이 모인 결과이지 순간의 우연 때문이 결코 아니였다.

자발적 집단 의지로 화합력 급상승

드로이젠은 역사란 경험적 견문과 연구의 결과라고 말하고, 어떤 공동의 작업을 수행해 나가는 데는 각각의 개별적인 존재로서가 아니라 집단적 존재로서 사회적 공동체의 구성원으로 사고하며 행동함으로서 이루어진다고 했다.

안경사법이 구성원들이 뜻한 바대로 성사되게 된 것은 일선에 사심 없이 나서 정열적으로 일하는 집행위원들을 절대 신임하고 성원을 아끼지 않았다는데, 그 첫째 원인을 꼽을 수 있게 않을까 싶다.

대책위원들이 역사적 사명의식에서 혼신의 힘을 다하는데 어찌 나몰라라 방관할 수 있겠느냐 참여했던 대책위원들이 한결같은 후일담이다.

이처럼 상호이해는 인간 사이에 가장 내면적인 유대에서 인류적 존재로서의 모든 인간의 토대이다. 이번 안경사법개정 투쟁에 안경인협회라는 공식기구가 전면에 나서지 않고 애오라지 회무에만 전념하게 된 것은 8대 집행부에서 얻은 타산지석의 교훈에서이다.

공식기구의 움직임(활동)은 자칫 ‘집단이익’이라는 한국적•정서적 추이(推移)가 될 수 있기 때문에 대책위원회가 전면에 나서게 될 연유이다. 역사가 결코 완성된 일이 없고 진행 중인 이상, 이에 관한 학문 역시 완성을 추구하고 계속된 노력을 할 뿐이다. 역사는 항상 생성과 변화의 흐름 속에 있기 때문이다.

김호곤 대책위원장을 비롯한 정순원 간사, 부회장단과 실행위원, 그리고 전국 각 시도 대책위원들은 안경사(眼鏡史)에 길이 남을 훌륭한 업적으로 기록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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